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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기의 사진이 있는 이야기/ 아관파천의 아픈 역사를 품은 '고종의 길'을 아시나요
 
상조매거진   기사입력  2024/10/04 [13:52]

 고종의 길

 

한남기 사진작가
동국대학교 평교원 교수 

1895년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 새벽,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겨 경복궁 영추문 빠져나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의 ‘아관’은 당시 러시아를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했기 때문에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다. ‘파천’은 임금이 피란을 가는 것을 뜻한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정세가 바뀌었다.

 

수틀리면 경복궁에 칼 들고 달려가던 일본이었지만 러시아의 허가 없이는 건드릴 수 없는 러시아 외교공관에 머무는 고종을 일본은 더 이상 압박할 수 없어 을미사변으로 구성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었고 그 대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됐다.

 

이후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조선에서 손을 떼기까지, 일본은 함부로 조선을 건드리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고종은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광무개혁을 주도하여 전기, 전차, 전화, 우편, 수도 등의 근대 문물을 들여오고 우리은행, 연세대병원, 서울대병원, 한국전력공사, 한국철도공사 등을 세웠으며 용산에 공장들을 세워 산업지대로 육성했다. 

 

러시아 공사관



행정부문에서 일본제국 헌법과 굉장히 유사한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고 야전과 지계를 비롯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한성개조사업을 추진해 한성을 깨끗한 근대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용어는 국왕에 대한 일본의 노골적인 폄하의 뜻이 담겼고 ‘아관망명(俄館亡命)’이 올바른 용어라는 시각이 있다. 당시 외국에선 대부분 ‘망명’이라고 표현했고 고종실록에는 ‘이어(移御)’나 ‘이필주어(移蹕駐御)’, ‘이차(移次)’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고종은 한양도성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파천이 아니고 외국 대사관 또는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사례를 망명이라 하기 때문에 뜻으로도 정확하다.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이 설립한 한성신보, 그리고 친일파들만이 ‘파천’이라고 불렀다.

 

고종은 1년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 동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은 경운궁에 나아가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경복궁을 방문하며 백성들을 안심시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96년 5월 16일에는 경운궁에서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를 접견했으며 7월 16일에는 일본 특명 전권공사 하라 다카시를 접견하였다. 덕수궁사에 의하면 고종은 경운궁 대유재에서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

 

‘고종의 길’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된다.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 29일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와 234일 뒤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국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마지막 의지를 불태웠다. 

 

고종의 길은 2016년 9월 복원이 시작되어 2018년 10월 정식 개방됐다.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로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나라 소유의 토지가 되면서 그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한 것이다. 고종의 길 서쪽 끝으로 나가면 옛 러시아공사관의 3층 전망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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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10/04 [13:52]  최종편집: ⓒ sangjo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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