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600년 서울의 상징이자 세계유산이다. 도성 안 4개의 산(백악산·낙타산·목멱산·인왕산)이 이어져 울타리가 되었다. 성벽과 성벽 사이에 성문을 만들고 사람이 오갔다. 도성 안과 밖을 구분 짓는 4개의 대문(흥인문·돈의문·숭례문·소지문)이 사대문이다. 현판에 쓰여 있는 ‘인·의·예·지’ 이 네 가지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다. 한양도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다. 아니 있었다. 대문과 대문 사이에는 소문이 있다. 대문은 남대문과 동대문이 제일 크고 2층 누각도 있다. 서대문과 북대문은 보이지 않는다. 서대문은 1915년 일제강점기에 도로 건설과 전차를 놓기 위해 없애 버렸다. 북대문은 오랜 시간 동안 북악산 기슭에 숨어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서울의 4대문은 조선시대에 도성을 출입하던 성문이다.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은 창건 당시에 지어진 이름이 아니고 일제 강점기에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1394년 도읍을 지금의 서울로 천도할 때 동서남북에 4대 성문을 배치하면서 동쪽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홍지문(弘智門)이라고 명명했다. 국보 1호인 남대문과 보물 1호인 동대문은 아직도 서울 도심 명소로 건재하고 지명만 남은 서대문까지도 친숙한데 북대문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 생소하기만 하다.
숙정문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중 하나로 서울 북쪽의 성문이다. 숙정문은 1396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 근정전 동쪽에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삼청터널에서 우거진 산 속의 접근로를 따라 숙정문에 오르면 서울성곽은 동쪽을 향해 낙산을 거쳐 아래로 뻗어 내려가고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숙정문은 건립된 지 18년 뒤인 태종 13년 1413년에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 의해 폐쇄됐다. 그 후 1504년 연산군 10년에 조정은 숙정문을 동쪽으로 옮겨지었는데 그 때 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은 숭례문(남대문)이나 흥인지문(동대문) 그리고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이름 정도로만 알려졌던 돈의문(서대문)과는 달리 유일하게 북악산 기슭에 있는 내륙 소재 관문이어서 1993년 문민정부 당시 북악산 전면개방 이전까지는 세간에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관문이었다. 1968년 북한 간첩 출신인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1.21 사태)이 일어나면서 이 때부터 북악산 일대가 전면 통제되어서 그 이후 숙정문에 대한 인식도 떨어지게 되었으나 북악산 전면개방 이후 숙정문의 관람이 허용되면서 일반인들에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북대문은 버스로 갈 수가 없다. 지하철역도 근처에 없다. 택시를 타고 가도 알 수가 없는 숲속 깊은 곳에 있는 문이다. 처음에 지(智)를 밝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소지문(昭智門)이라 하였다. 하지만 지혜로움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었다. 고요하고 정숙해 지기를 바라며 숙정문으로 불리었다. 삼청각과 삼청터널 사이에 북악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수 백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계단은 대리석 계단으로 바뀌고 숙정문이 나타난다. 산속에 있는 숙정문은 단지 사대문과 사소문의 격식을 맞추려고 지은 것일까? 하지만 산속에 있는 이점도 있다. 사대문과 사소문 중 유일하게 양쪽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곽과 성벽 주변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처럼 숙정문이 정말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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