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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기 작가의 사진이 있는 이야기] 경복궁 4대문과 2소문을 아시나요
 
한남기 동국대 평교원교수   기사입력  2020/09/29 [10:34]
▲ 광화문     © 상조매거진

 

경복궁은 아스팔트 차도와 고적한 인도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담장을 따라 경복궁을 한 바퀴 둘러보다 보면 4개의 대문과 2개의 작은 문을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 정궁이었던 경복궁으로 통하는 4대문은 동쪽의 건춘문’, 서쪽의 건추문’, 남쪽의 광화문그리고 북쪽의 신무문이 있다. 신무문 서쪽으로는 경복궁의 2개의 소문인 계무문과 광무문이 나란히 있다.

 

경복궁은 풍수지라가 접목된 궁궐터에 세워졌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를 모두 갖춘 명당이 바로 경복궁터이다. 동쪽에는 봄을 뜻하는 건춘문, 서쪽에는 가을을 뜻하는 영추문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북쪽 신무문은 사신도(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서 북쪽을 뜻하는 북현무의 자를 따서 문 이름을 지었으니 방위에 맞게 계절을 적용시켰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남문)

경복궁의 남문이며 정문이다. 경복궁의 창건 시에는 특별한 이름없이 정문으로 부르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의 학자들에 의해 성문과 다리 등에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소 광화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화문은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라는 뜻의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유래된 것이다. 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에 사대문 중 규모와 격식 면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이다. 특히 하나의 홍예문을 가진 다른 문들과 달리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광화문은 정문인 까닭에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그런 이유로 광화문은 2010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4대문 중 건립 역사가 가장 짧다.

 

건춘문(동문)

경복궁의 동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하기에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건립양식은 홍예무사석 기단(基壇) 위에 정면 3, 측면 2칸으로 세워진 문루(門樓)로서 익공(翼工) 우진각 지붕이며, 홍예문을 하나 내어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다. 겹처마에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兩城)을 하였으며,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열하고 아래 끝에 토수(吐首)를 끼웠다. 건춘문으로 들어오면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이 문은 왕족, 척신, 상궁들만이 드나들었다. 또한 대궐에 열병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건춘문은 왕실 종친과 동궁 영역 궐내각사에 근무하는 관리나 궁녀 들이 출입하였던 곳으로 홍예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 영추문     © 상조매거진

 

영추문(서문)

4대문 중 마지막으로 2018126일 영추문이 43년 만에 개방되었다. 영추문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돼 고종 때에 이르러 재건했다.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다가 197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지만 청와대 경호를 맡던 수경사가 주둔하면서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됐던 곳이다.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므로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건춘문과 꼭 같은 규모로서 정면 3, 측면 2칸의 문루로 된 이익공집 우진각 지붕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각 지붕마루에는 양성이되고 취두, 용두, 잡상이 얹혀 있다. 홍예문을 하나 내어 출입하게 한 축대 위에 단층의 누를 지었다. 승지(承旨)나 홍문관(弘文館), 교서관(校書館)등 궁중 안에 있는 청사에 근무하는 관료들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으로만 출입하였다. 이 곳 홍예 천정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신무문(북문)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북방의 현무(玄武)에서 따온 이름이다. 1433(세종15)에 지은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중건하였다. 높다란 석축위에 정면 3,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다. 임금이 경무대에서 거행되는 과거장에 행차할 때 이 문을 열었다. 북쪽은 음기가 많다고 하여 평소에는 닫아 두었던 문인데 그래서인지 신무문은 반역의 역사와 연관되기도 한다. 또한 신무문은 경복궁 4대문 중 일반 백성이 드나들 수 있었던 문으로 조선시대에는 후원으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청와대 지역이다.

 

계무문, 광무문

계무문은 그 용도가 정확히 알려진바 없으나 전해오는 말로는 사람들의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고 한다. 계무(癸武)는 북쪽을 상징하는 동물인 현무를 의미하며 계()는 마지막 방위로서 북쪽에 해당한다. 광무(廣武)는 무용을 넓힌다는 의미로 이문은 평상시에는 잠겨 있다가 왕이 직접 쟁기로 갈고 모를 심어 직접 농사를 지어보이는 행사인 친경행사 때 임금이 이용하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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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9/29 [10:34]  최종편집: ⓒ sangjo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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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4/10/06 [01:17] 수정 | 삭제
  • 영추문인지 건추문인지 헷갈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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