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고민에서 시작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
우연한 사고로 거대한 야생에 불시착한 로봇 ‘로즈’. 고객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결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그는 야생에서 만난 동물들에게 고객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지만, 그들은 이 낯선 존재에게 경계심만 보인다. 오랜 시간 주변을 관찰하며 동물들의 언어까지 터득했음에도 여전히 미지의 존재로 홀로 남겨진 로즈는 낯선 환경 속에 적응해 가던 중 사고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기 기러기 ‘브라이트빌’을 만나게 된다.
사실 브라이트빌은 좌충우돌하던 로즈가 우연히 파괴한 기러기 둥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이었다. 로즈는 그런 브라이트빌을 알 때부터 보호하며 결국 부화한 그를 첫 고객으로 맞이한다. 브라이트빌은 로즈를 자신의 엄마로 받아들이고, 로즈는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영악한 여우 핑크, 그리고 같은 엄마의 처지인 주머니쥐 핑크테일의 도움을 받아가며 브라이트빌이 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기까지 길러내게 된다.
철새인 기러기가 겨울을 앞두고 떠나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로즈는 자신의 브라이트빌에 대한 마지막 미션인 나는 법 가르치기에 나서고 다른 기어기에 비해 왜소한 브라이트빌은 힘겹게 수영과 비행을 배우게 된다. 그러던 중 다른 기러기들의 놀림과 무시를 받으며 우연히 로즈가 자신의 가족들을 죽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로즈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과연 로즈와 브라이트빌은 다시 화해하고 브라이트빌의 기러기로서 첫 대이동을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까. 지난 10월 1일 국내 개봉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와일드 로봇’의 줄거리다. 이 작품은 드림웍스 30주년 기념작으로,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작가인 피터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개봉하자마자 드림웍스 역사상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올해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꼽고 있으며, 로튼 토마토 신선도 98%, 메타크리틱 점수 85점, IMDb 유저 평점 8.5점을 기록했다.
와일드 로봇은 굉장히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보면 프로그래밍 되어 만들어진 로봇이 생명을 키우면서 모성애를 깨닫는 일종의 성장형 휴먼 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기서 시작하는 메시지는 다양한 상황들과 융합하며 조금씩 진화해간다. 로봇인 로즈와 로봇에게 길러진 연악한 기러기 브라이트빌이 갖는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든 여우 핑크까지 포함된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유사 가족’의 관계, 이를 기반으로 사회로까지 확장되는 관계의 의미와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삶과 공통체에 대한 태도까지 단계적으로, 동시에 복합적으로 다양한 생각의 거리를 던진다.
우리의 세계를 지키는 힘: 사랑, 화해, 그리고 연대
와일드 로봇이라는 제목은 로봇 로즈가 야생에 떨어진 상황, 배경, 그리고 거기서 예상되는 이야기의 방향을 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와일드’라는 단어에 내포된 야생의 잔혹성, 생존의 혹독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야생에 떨어진 로즈는 낯설고 거친 세계에서 엄청난 생존의 위기를 겪는다. 수많은 동물들의 공격을 받고, 몸이 분해되고 부속을 도난당하는 잔혹한 상황에 놓인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하드웨어가 아니라면 이미 그는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일까. 로즈는 자신의 존재 목적인 ‘헬퍼’의 역할에 집착하고, 오로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 혹독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브라이트빌은 로봇을 엄마로 알고 살았지만, 사실은 그가 자신의 본 가족이 죽은 사고의 유발자임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기러기로서의 정체성은 갖고 있지만 정작 기러기들에게서는 외면 받고, 엄마가 자신의 은인이자 비극의 원인이기도 한 아이러니의 집합체다. 심지어 냉정히 따지면, 부화하는 과정에서부터 형제들과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연약한 브라이트빌에게 닥친 사고는 오히려 그를 생존할 수 있게 한 행운인 셈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지만, 결국 그는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훗날 기러기들의 리더가 되어 돌아올 정도로 성장한다.
핑크는 처음에는 로즈가 브라이트빌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떡고물이나 받아먹을 심산으로 접근해 로즈의 생존과 양육을 돕지만, 어느 순간 로즈, 브라이트빌과 진심으로 의지하고 돕는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난다.
실제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들 세 가족의 성장 경험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지키고 생존하는 힘이 된다. 평범한 이야기라면 아마 이 정도 선에서 이야기는 매듭지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경험을 더 큰 세계로 확장한다.
야생에는 겨울이 찾아오고, 그 겨울은 여태껏 보지 못한 강추위를 몰고 온다. 수세대의 DNA를 거치며 쌓아온 동물들의 생존 노하우가 무력해지는 수준이다. 이런 대재앙의 위기에서 로즈는 다른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 황폐해진 몸을 이끌고 눈발이 날리는 야생으로 나간다. 내키지 않았지만 핑크 역시 로즈의 뜻에 따른다.
로즈의 집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생명들이 모이면서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함께 해야 할 때임을 부르짖는 핑크의 연설로 다 함께 평화로운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나의 위기가 공동체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가 나의 위기가 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함께 연대해야 생존할 수 있음을 배우고, 이는 훗날 로봇회사인 다이나믹스사에서 비범한 로즈의 경험 데이터를 탈취하고자 섬을 찾았을 때 다 함께 똘똘 뭉쳐 로즈와 섬을 구하는 힘이 된다.
하나의 존재에서 대한 고민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성찰의 메시지로 확장되는 구조를 자연스러운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내고 야생의 장대한 풍경과 역동성을 살린 매력적인 비주얼에 담아낸 ‘와일드 로봇’. 그야말로 굉장한 완성도와 매력을 지닌 명작임이 틀림없어 보인다.